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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Wiz(2006-07-19 18:48:26, Hit : 4590, Vote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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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 이순신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 1편


우리 민족의 역사상 가장 극적이었던 순간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명량의 대승리를 첫손에 꼽는다. 1597년 9월 16일 미명(未明), 바다를 뒤덮은 일본함대가 거대한 수평의 폭포 같은 명량의 조류를 타고 거세게 밀어닥쳤다. 500척이 넘는 일본의 대 함대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거창한 전력(戰力) 앞에 나타난 것은 겨우 13척에 불과한 조선 함대, 1)무려 50대 1이 넘는 열세였다. 세계 역사를 통틀어도 그토록 차이가 나는 집단들이 정면으로 격돌한 사례가 없다. 5년 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자 망할 뻔 했던 나라를 혼자의 힘으로 구해내었던 불세출의 영웅 이순신도 50대 1의 열세를 극복할 수는 없었을 터였다. 그것은 상식의 문제였다. 지켜보던 백성들도 다만 시간이 문제일 뿐이라고 규정했다. 그날이 이순신과 조선 수군 최후의 날이라는 것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순신과 더불어 초라하게 전락한 조선수군의 최후가 한바탕 신명나는 추임새 속에 사라질 것인가? 이순신의 최후는 바로 조선의 최후였다. 그는 자신에게 내려진 사형선고를 스스로 집행하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단호하게 칼을 뽑았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必生卽死)의 여덟 글자를 불사(不死)의 주문처럼 외치며 피른 본 상어 떼처럼 밀려드는 적들에게 격돌해 갔다. 그는 자신의 몸과 함대를 마개로 삼아 명량을 틀어막고 죽음을 갈구하는 악귀처럼 싸웠다. 본능적인 죽음의 공포에 직면하여 물러서려는 부하들과 이미 물러선 부하들을 질타하여 얼마나 싸웠던가? 마침내 이순신은 자신의 몫으로 결정되어진 죽음과 패배를 베어버렸다. 그는 텃밭에 씨를 넣으려는 농부처럼 거침없이 바다를 갈아엎었고 적들은 쟁기에 토막 난 지렁이 떼처럼 꿈틀거리며 비명을 질러대었다. 이순신의 장검이 크게 베어질 때마다 일본 함대는 사쿠라의 군락처럼 화사하게 불타올랐고 지글지글 불타는 적병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을 지르며 바다에 뛰어들었다. 전투가 벌어진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일본군은 처참하게 패배했다. 결코 질 수 없었던, 아니 진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조차 하지 못하던 전투의 결과는 전멸에 가까운 대참패였다. 감히 대낮에 서리를 하러 왔다가 혼쭐난 아이들처럼 비명을 지르면서 달아나는 일본군들은 이순신이라는 세 글자를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잊을 수 없었다. 그렇게 거대한 일본의 주력은 산산이 분해되었고 그들을 보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대야망은 명량의 거친 물목에 침몰 당했다. 두 번째의 결정적 참패를 같은 인물에게 당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만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 주석

1) 명량해전이 끝난 다음 이순신의 보고에 의하면 130척과 싸워 그 가운데 31척을 격파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당시의 일본군은 불리한 전쟁의 대세를 일거에 역전시키려고 시도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 500척 이상의 대함대가 필요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운명이 걸린 작전에 겨우 130척을 투입할 리가 만무하다. 그렇기 때문에 명량에서의 이순신은 최소한 500척 이상의 대함대를 맞아 싸웠다는 결론이며, 거기서 50대 1이라는 격차가 나오는 것이다. 게다가 일본함대를 거의 섬멸하다시피 했다. 그 근거는 당시 참전했던 일본 장수들이 작성한 문서가 증거로 제시되는데 1척에 50명만 잡아도 무려 2만 명 이상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실로 엄청난 대전과지만 이순신은 그 사실을 감춰야만 했다. 간신들의 모함으로 이순신을 죽이려던 왕이 믿어줄 리도 없거니와, 그 사실이 알려지면 이순신을 잡아들이고 원균을 등용시킨 왕의 실책이 만천하에 알려지게 되는 셈이니 그 경우에도 왕이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결국 엄청난 공을 세우고도 축소시켜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인데, 당시의 조선이 얼마나 한심했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백번을 양보해서 그 보고가 사실이라 해도 130척이면 무려 10배에 이르는 전력이 아닌가? 10배나 되는 적을 산산이 격파한 것도 세계 역사상 유례가 극히 드물다.


그로부터 308년 후인 1905년 5월 27일, 쓰시마 남쪽 수로에서 벌어진 일대격전에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일격에 격멸시켜 일본을 근대의 강국으로 끌어올린 연합함대의 사령장관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였다. 그는 '나를 영국의 넬슨 제독에게 비유하는 것을 몰라도, 조선의 이순신 장군에게 비유되는 것은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일' 이라며 경건하게 옷깃을 여민다. 도고는  일본에서 군신(軍神)으로 추앙 받기에 손색이 없는 영웅이었고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여 나폴레옹의 야망을 꺾은 넬슨 제독 역시 굳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위대한 영웅이 아니었던가,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도고 헤이하치로가 스스로를 겸허하게 낮추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미안하게도 그는 분명한 사실을 명확하게 말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생각해 보라, 도고와 넬슨이 자신들의 조국에게 배반당한 적이 있었던가? 아니면 하루아침에 영광된 해군총사령관에서 반역 죄인으로 전락하여 처참한 고문을 당한 적이 있었던가? 이순신은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 모친까지 별세하셨으니 그 슬픔을 일러 무엇 하겠는가, 이건 사면초가라는 표현을 쓰기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도고와 넬슨을 포함한 대부분의 영웅들이 거두었던 승리와 이순신의 승리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들의 승리는 모든 신망을 한 몸에 받고 군사적인 역량이 충분히 집중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들은 충분히 우승할 수 있는 역량의 팀을 이끌었고 국가의 어스시트를 받아 골로 이어준 것이었지만, 이순신은 그들과 철저하게 반대의 입장에서 싸워야만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언제는 믿기지 않는 대승리였다. 그 분은 가장 열세하고 열악했던 환경에서도 11명을 모두 제치고 상대방의 골대에 대포알 같은 슛 세례를 퍼부었으니, 그것이 과연 인간의 기량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동서고금을 통틀어서 그 분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그런 대승리를 엮어낸 영웅이 있다면 어디 나와 보라고 하라! 서양인들이 최고로 꼽는 줄리어스 시저와 알렉산더 대왕, 한니발 장군을 다 합쳐도 50대 1의 열세를 일거에 역전시킬 수는 없다. 동양의 최고전략가로 공인되는 제갈공명과 2)손무라고 해도 가망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50대 1은 그만두고, 5대 1의 상황이라도 절망적일 진대, 하물며 고문과 슬픔에 피폐한 몸으로 오합지졸을 거느렸으니 더 이상 무엇을 말하리오. 그러니까 도고 헤이하치로가 그 분에게 스스로를 낮출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이라고 다 같은 사람이 아니듯, 영웅이라고 다 같은 영웅이 아닌 것이다.

 

* 주석

2) 손무는 그 유명한 손자병법의 저술자이다. 그의 손자인 손빈이 저술했다는 설도 있으나, 손무가 저술한 내용의 일부를 개편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 승리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위대한 그분의 생애부터 차근차근히 말하기로 하자. 그 위대한 삶과 죽음을 어찌 약간의 글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열권의 책으로도 모자랄 지경이며 실제로 나는 그분에 대한 역사소설 열권을 출판했으나 그것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는 생각에 한숨만 지을 뿐이다. 나는 그분 때문에 작가가 되었지만 만일 그 분에 대한 저술들이 충분했다면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을 터였다. 막상 후학들이 배우려고 하면 제대로 된 책 한권도 없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그런 대접을 받는 분이 어디 이순신뿐이겠는가, 어릴 때 필수적으로 읽어야 하는 위인전집 아니면 위대한 영웅들이 설 자리가 없다. 위인전집 이상으로 다룬 서적들이 거의 전무하다는 현실이 나를 작가가 되게 만들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독학을 시작했지만, 즉시 쇼킹한 사건과 맞닥뜨렸다. 나의 영웅이 첫 번째 과거에 어이없게도 낙방하신 것이 아닌가? 그것도 당시로서는 상당히 늦된 스물여덟의 나이였고 낙방 사유도 종합적인 평가 점수가 모자랐던 것이 아니라, 타고 달리던 말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그런 수준의 영웅들은 대부분이 스물이 되기도 전에 장원으로 급제해야 마땅한 것으로 알고 있던 나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재수(?) 끝에 4년 후 서른둘의 나이로 합격하지만 빛나는 장원과는 거리가 먼 성적이었다.

 

이순신이 대과(大科)에 응시하지 않고 그렇게 늦은 나이에 무과를 응시한 것을 두고 이런저런 말이 많다. 세인(世人)들은 “조부이신 백록 공께서 중종 시대에 발생한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후손들이 문과에 응시하는 길이 막힌 결과”라고 말한다. 전에 방영된 사극에서도 그렇게 표현되지만 사실과는 전혀 다르다. 선구적 개혁가인 조광조가 주초위왕(走肖爲王)의 모함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되고 그로 인해 사림이 철퇴를 맞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발생한 것은 중종 14년인 1510년이며 복권된 것은 선조(宣祖) 1년인 1568년의 일이다. 조광조가 복권된 당시 이순신의 나이는 만으로 23세였는데, 그 이전에는 몰라도 이후에는 얼마든지 과거를 치를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게다가 이순신의 바로 위인 둘째 형 요신이 소과에 진사進士로 급제한 사실은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본래 소과는 대과를 응시하기 위한 전단계이다. 요신이 조부의 일에 연좌되어 문과를 치를 수 없었다면, 당연히 소과도 응시할 수 없어야 했고 설령 급제한 이후에도 신원조회에 부적격자로 통보되어 합격이 취소되어야 마땅할 할 터이다. 요신이 소과에 급제한 것을 보더라도 세인들의 주장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이순신이 문과를 치를 수 없었던 것은 바로 빈한한 가세(家勢)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학업에 매진하여 성취하려면 경제적 뒷받침이 필수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순신의 집안은 대단히 빈곤했다. 오죽 했으면 모친의 친정이 있는 아산 백암리로 낙향을 하였을까? 그런 형편에 이순신은 자신의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조선에게 실로 엄청난 행운을 가져다주는 첫 출발점이었다. 벼슬에서 은퇴하여 아산에 살고 있던 무관 방진(方辰)은 한눈에 이순신의 재질을 알아보고는 그를 사위로 맞는다. 그 이후에 이순신이 무과를 선택한 것은 필시 방진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며 실제 무예와 병법의 기초는 장인인 방진에게서 전수받았을 확률이 크다. 만일 이순신이 빈곤하지 않아서 무사히 대과를 치렀더라면, 그래서 좋은 벼슬을 하여 풍족하게 살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참으로 알 수 없는 운명의 안배였다.


각설하고, 서른두 살에 임관한 이후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까지의 행적은 그리 특이한 것이 없다. 본래 그 당시는 육군과 수군이 전문화되어 있지 않아서 육군과 수군을 오갔었으며 파직(罷職)도 경험했었다. 본래부터 불의와 부정을 참지 못한 성격이었으니 자연히 적이 많았고 그것이 벼슬을 떼이는 파직으로 이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한 가지 특기할 점은 백의종군과 불차탁용(不次擢用)에 대한 것이다.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 이미 한 번의 백의종군을 기록하셨는데, 그것은 43세 무렵인 1587년에 북쪽의 최전방인 녹둔도에서의 일이었다. 압도적인 여진족이 기습을 가하는 바람에 중과부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책임을 물어 백의종군을 당하게 된 것이다. 백의종군은 지금으로 치면 이등병으로 강등되는 것이라서 장수로서는 치욕적이겠지만 만일 3)유성룡이라는 후원자가 없었다면 훨씬 더한 처벌 - 사형 같은 - 받았을 확률이 크다고 본다. 그럴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그 방면의 실패는 상당한 골칫거리여서 이순신이 정치적인 희생양이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일은 지금도 얼마든지 발생하는 것이며 믿음직한 배경이 있으면 그런 곤경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도 그리 다를 바가 없다.

 

* 주석

3) 유성룡은 이순신과 친구 사이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는 이순신보다 3살 연상으로 작은 형인 요신의 친구이다. 그러니까 의형으로 보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유성룡은 이순신의 후원자로서 두 사람을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을 정도다. 훗날 노량에서 이순신이 전사하던 날 유성룡도 탄핵을 당해 벼슬에서 물러났으니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라고 본다.


이순신은 48세 무렵인 1592년, 전라도 여수에서 전쟁을 맞게 된다. 당시의 직급은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 약칭 전라좌수사였다. 전라남서부의 수군을 통괄하는 직책으로서 정 3품의 당상관으로서 군사적 실권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 이전에는 정읍의 현감이었다. 현감은 겨우 종 6품으로서 외직(外職)에서는 가장 낮은 벼슬이었다. 실제로 과거에 장원을 한 사람이 처음으로 제수되는 것이 종 6품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 이순신의 위상은 그러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종 6품에 불과한 사람이 갑자기 무려 6계단을 승진하여 정 3품의 전라좌수사가 된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지금으로 치면 중대장 급이 사단장이 되었거나 과장급이 이사급으로 승진한 것과 동일한 상황인데, 그것은 바로 숙명의 적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덕분이었다. 4)일본 천하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공할 것이라는 소문이 설득력을 얻자 부랴부랴 대책마련에 들어갔지만 조선은 사람을 새로 뽑는 것 밖에는 달리 할 것이 없었다. 그에 따라 실시된 불차탁용에 2등으로 뽑히게 된 것이다. 불차탁용은 비상시국이나 기타 그와 유사한 상황이라고 판단될 때 과거 합격 여부나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유능한 인재를 뽑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조선 같은 관료사회에서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 판에 겨우 종 6품에 불과한 자를 무려 여섯 계단이나 승진시킨다는 것은 엄청난 파장을 불렀을 것이었다. 거기다가 당파 싸움이 제자리를 잡을 시기인 것을 감안하면 반대 당파의 만만치 않은 자가 사단장 급으로 승진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을 터였다.

 

* 주석

4) 이 부분은 상세하기 설명하기 곤란한 부분이다. 특별히 어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통신사들을 참조하는 것이 좋겠다. 일본의 침공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통신사들을 보냈지만 그들의 의견이 완벽하게 엇갈리는 바람에 오히려 큰 혼란이 초래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 아닌가? 조선의 외교적 역량은 겨우 그 정도에 불과 했다.


그러나 왕 - 그 유명한 선조(宣祖)였다 - 이 밀어붙이는 바람에 그런 벼락승진이 가능했다. 실로 이것은 천우신조였다. 나중에 명량에서 믿을 수 없는 대승을 거둔 이순신이 “실로 천행天幸이었다”며 말하는 대목이 있지만, 그때 이순신이 전라좌수사가 된 것이야말로 천우신조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레벨의 천우신조였던 것이다. 그때 만일 전라좌수사로 승진하는 것이 좌절되었다면 대체 누가 있어서 바다를 지킨다는 말인가? 나는 아무런 종교가 없지만, 그 상황을 공부하면서 “이것은 분명히 하늘의 뜻”이라고까지 확신할 정도였다. 전라좌수사라는 자리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는 나중에 따로 설명하도록 하겠지만 5)당시의 왕인 선조가 이순신을 민 것은 유일하게 잘 한 일이라고 평할 수 있다. 물론 결과론적인 이야기다.

 

* 주석

5) 이 부분도 설명하기 대단히 곤란하다. 제대로 설명하려면 적어도 책 한 권 분량이 필요할 정도다. 하지만 기본 맥락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으니 아무래도 [당파싸움]으로 방향을 잡는 게 좋을 터이다. 당파싸움의 시발점은 조선의 14대 임금인 선조(宣祖) 시대에 발아(發芽) 했다는 것이 정설로 인정된다. 그 이전에도 비슷하게 작당하여 치고받은 사례가 그리 드물지는 않으나, 대부분이 왕실의 인척이나 권신(權臣)들에 의해 주도된 것이어서 사림(士林)들에 의해 주도된 진정한 당파싸움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당파싸움의 주역들은 과연 어떤 자들이었는가? 지극히 비열하고 치사하면서 자신 밖에 모르는 자들의 집단끼리 싸우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이 들겠지만 그들 대부분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들이었다. 특히 당파싸움의 발원으로 판단되는 선조의 시대는 조선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 줄줄이 포진했었다. 그 유명한 퇴계 이황 선생과 율곡 이이 선생을 위시해서 기대승, 정철, 유성룡, 이산해, 정탁, 이덕형, 이항복, 정인홍. 최영경, 김성일, 이원익, 윤두수, 우성전, 남이공 등등의 인물들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분들이다. 거기다가, 이순신, 권율, 신립, 곽재우, 조헌, 송상현, 김시민, 정발 등등의 용장이 즐비했다. 조선이 아니라 우리 역사를 통틀어도 그럼 수준 높은 인재들이 한꺼번에 등장한 시기도 드물었다. 하지만 기가 막히게도 당파싸움은 바로 그 시대에 촉발된다.

 

문제는 왕인 선조였다. 그는 조선 최초로 세자나 왕자가 아닌 상태에서 왕위를 물려받은 케이스였다. 정식의 왕후에서 태어났다면 세자로 봉해지거나 대군(大君)의 칭호를 받아야 했지만 그는 그저 하성군이라는 왕실의 떨거지에 불과했다. 그의 부친 덕흥군은 중종대왕께오서 창빈이라는 후궁에게서 얻은 9번째 아들이었으니, 흔해빠진 첩 소생 왕자의 아들이 바로 선조였었다. 세상이 평온했었다면 그저 왕실의 떨거지로 살다 갈 것이었으나 처참한 권력투쟁에 왕실의 씨가 마르자 하루아침에 [그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라, 앉혀지게 된] 것이었다. 선조는 그렇게 정상적인 등극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최초의 왕이었다. 본래부터 대단히 머리가 좋았지만 거기에 자격지심이 배합되자 마침내 비극이 탄생하고야 말았던 것이었다.

 

비열한 선조는 유능한 신하들의 역량을 하나로 묶은 다음 각자의 장점을 흡수하여 백성들을 어질게 다스리는 대신 그들을 이간질하고 분열시켰다. 어느 때는 이쪽 편을 들어주고 다음에는 저쪽 편을 들어주었으니 신하들이 피터지게 싸우게 되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 이전의 당파는 학연으로 구분되었을 뿐이어서 서로를 존중하는 최소한의 예의는 지켰지만 선조의 충동질에 수 천 명이 억울하게 죽어나가자 마침내 서로의 가슴에 칼을 겨눌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처절하게 싸우게 되자 선조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어쨌든 왕은 왕이 아니던가? 왕이 손을 들어주는 쪽이 승리하게 마련이어서 신하들은 필사적인 충성 경쟁에 돌입했다. 선조는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하는 동시에 마음껏 이득을 챙길 수 있었다. 그것이 선조가 노리던 본질이었으니, 마침내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임진왜란의 치욕을 당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는 전쟁으로 들어가도록 하자,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승진한 다음 임지인 여수에서 어떻게 철저히 전쟁에 대비하였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다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거북선]에 대한 부분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이순신과 거북선은 분리해서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한다. 이순신이 만든 무적의 전함인 거북선이 입에서 불을 토하며 왜적들을 무찌르는 것은 상상만 해도 통쾌하다. 대부분의 승리가 거북선에 의해 거두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그 무수했던 전투에 거북선이 투입된 것은 단 두 차례에 불과하다. 임진년의 사천 전투와 그 유명한 한산대첩에서 전투에 참가한 이후에는 거북선이 참전한 기록이 없다. 나중에 전쟁이 소상상태에 접어든 다음 한 번 나타나지만 그때는 전함으로서가 아니라 수송선으로의 용도이니 거북선의 신화는 그리 믿을 것이 못 된다.

 

물론 이순신이 전쟁 발발 직전까지 거북선 건조에 큰 비중을 두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거북선의 전투력이 발군이었다는 것도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거북선이 실전에서 도태되었는가? 그것은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겠는데 우선 거북선이 별도의 전함으로 건조된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의 주력전함이었던 판옥선(板屋船)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판옥선은 길이가 대략 20미터에 높이가 2미터 가량이며 160명 정도가 탑승하는 대형전함이다. 게다가 무서운 화포를 장비한 판옥선은 동양 최강의 전함이었다. 그러나 근접백병전에 강한 일본군이 뛰어드는 날에는 어떻게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 일본군들은 졸병들도 칼 쓰는데 도가 텄지만 조선군은 순박한 백성들이었으니 만일 일본군들이 판옥선으로 넘어와 칼을 휘두르는 날에는 정말 큰일이었다. 그래서 판옥선에 뚜껑을 덮어 아예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은 것이 거북선의 원형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방어력이 강화되어 일본군의 주 무기인 조총쯤은 가볍게 막아낼 수 있었다. 그래서 돌격에 앞장세워진 것이며 본래가 강력한 화력을 보유한 포함(砲艦)이어서 근접돌격전에서 무서운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 때문에 거북선을 건조했지만 머지않아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이순신의 전법은 기본적으로 철저한 수색이 병행된 기동전술이었다. 그 목적은 당연히 적을 먼저 발견하여 먼저 공격을 가하는 것인데, 거북선은 공격을 가하기에는 적합했으나 빠르게 기동하는 데 문제가 발생했다. 본래 육중한 판옥선에 지붕을 얹다보니 아무래도 체중이 늘어나게 된 것이 원인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굳이 거북선까지 필요 없다”는 결론을 얻은 것에 기인한다. 전쟁 전에는 일본군의 장기인 근접백병전에 대단히 신경이 쓰였지만 막상 붙어보니 판옥선으로도 충분하다는 실전경험이 얻어진 것이다. 그렇게 되자 기동력에 문제가 큰 거북선의 효용가치가 줄게 되었고, 6)게다가 이순신 함대에게 여러 차례 혼이 난 일본함대가 아예 전투를 회피하자 거북선은 실전에서 도태되게 되었던 것이다. 거북선의 신화는 아직도 계속되지만 그것을 약간 뒤집어 생각하면 이순신이 거둔 승리의 대부분이 거북선에 의한 것이라는 부적정적 견해가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태종 연간에 한강에서 거북선 형태의 군선(軍船)이 목격되었다던가 아예 시대를 훨씬 거슬러 올라가서 고려시대에 선체에 칼과 창날을 꽃아 근접전에 대비한 검선(劍船)과 과선(戈船)을 언급하는 의도는 대체 무엇인가? 그토록 위대했던 신화의 골조가 겨우 다른 사람의 작품을 표절한 것에 불과했다는 불경한 이야기는 그만두도록 하자. 이순신의 승리는 어디까지나 뛰어난 전략과 전술에 기반 된 것이었고 무섭도록 철저한 준비가 그 바탕이었다. 거기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고 또 제기해서도 안 될 일이다. 하여간 거북선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하기로 하자.

 

* 주석

6) 실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나간 수군들에게 [절대 이순신과 싸우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계속되는 참패가 누적된 결과 전황에 악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다.


1592년 5월 4일 새벽, 여수 앞바다에는 전라좌수영의 모든 수군 전력이 집결해 있었다. 석상처럼 서 있던 이순신의 지휘채가 똑바로 앞을 가리키자 곡나팔이 길게 몸을 빼며 울었고 살벌한 북소리가 바다를 뒤흔들었다. 그것은 7년간의 대 전쟁에서 단 한 차례도 패배하지 않은 위대한 이순신 함대의 고고성이었다. 마침내 24척의 판옥선이 거대한 몸집을 뒤틀며 여수를 출발했다. 목표는 당연히 일본함대, 적의 수군들은 이미 부산과 인근 해역을 거점으로 확보했고 서서히 남해로 진격하는 중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전략은 수륙병진책(水陸竝進책), 육군이 조선의 가운데를 회 뜨듯 똑바로 가르고 올라가면 수군은 남해를 지나 서해로 북상하면서 보급을 담당한다는 것이 대전략의 골자였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의 승패는 보급지원에 달린 것이다. 우수한 첩자들을 보내 조선을 정탐한 결과 육로를 통한 보급은 대단히 곤란했다. 도로사정은 열악하기 그지없었고 조선도 거의 모든 세금을 바다를 통해 수송하는 만큼 보급은 당연히 바다를 통해야만 했다. 일단 육군을 성공적으로 상륙시키고 교두보를 확보한 일본 수군들은 보급로를 개척해야 했으며 전투와 수색에서 최정예로 공인된 함대가 남해로 들어선 것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들을 막아내야 할 조선함대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조선 최강을 자랑하는 경상도의 수군들은 이미 증발한지 오래였다. 조선은 전통적으로 북방은 육군이 강했고 남쪽은 수군이 강했다. 각각 여진족과 왜구들을 막아내었던 결과인데 임진년에 바다를 지켜야할 경상도 수군은 어이없이 무너졌다. 동래에 박홍이 지휘하는 경상좌수영, 거제도에 그 이름도 유명한 원균이 지휘하는 경상우수영이 존재했고 그들의 전력은 전라도의 몇 배를 가볍게 초과했지만 전투 한 번 치르지 않고 허무하게 사라졌다. 특히 원균은 무려 100척에 이르는 대 함대를 보유하고도 전투는커녕 제 한 몸 살자고 도주하기에 바빴다. 그때 원균과 박홍이 제대로 대응하여 상륙하려는 일본함대를 요격했었더라면 역사는 크게 바뀌었겠지만, 오호! 통재라, 겨우 그런 자들이 수군의 요직에 등용될 정도였으니 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5월 7일, 조심스럽게 다도해의 구석구석을 수색하면서 전진하던 이순신 함대는 마침내 거제도의 옥포에서 50여 척의 적 함대를 발견했다. 포구에 정박해 있던 적의 지휘관은 바로 도도 다카도라,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심복이자 일본에서 가장 용맹한 장수의 한 사람이었다. 다카도라는 황급히 응전에 나섰지만 이미 이순신 함대는 옥포를 완전히 봉쇄한 다음이었다. 곧 일본군은 죽어도 잊지 못할 참상을 당하게 된다. 엄청난 폭음과 함께 그야말로 기둥처럼 거대한 화살의 폭우가 퍼붓는 것이었다. 가장 강대한 화포인 천자총통(天字銃筒)에서 발사된 괴물 같은 화살의 정체는 바로 대장군전(大將軍箭)이었다.  직경이 한 뼘에다 길이가 거의 2미터에 달하고 무게는 쌀 반가마니에 이르는 대장군전의 위력은 가공, 그 자체였다. 단 일격에 일본 전함들의 갑판이 박살나고 돛대가 꺾였다. 작은 함선들은 거대한 도끼에 얻어맞은 것처럼 그대로 조각났고 탄착점에서는 어김없이 피와 살이 튀어 올랐다. 일본함대는 완전히 넋을 잃었다. 조총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가공할 화력을 퍼붓는 조선함대는 어떻게 싸워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처음에 도주한 6척을 제외하고는 깨끗이 전멸 당했고 도도 다카도라는 바다에 뛰어들어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바로 그것이 위대한 이순신 함대의 첫 전과였다.


여기서 잠깐 조선수군의 주력전함인 판옥선과 이순신의 기본 전법을 말하기로 하자. 판옥선이 거대한 체구에 강력한 화포를 주무기로 하는 전함이라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 있지만 지금은 그것이 출현하게 된 본질적 이유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조선의 무기체계는 발사무기가 보편적이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활과 화포였다. 조선의 전쟁은 대부분이 지극히 방어적 개념이었고 그러다보니 성에 의지해서 싸우는 전술이 발달하였다. 그런 상태에서의 전투는 활이 대단히 유용했다. 반드시 성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멀리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활은 조선군의 제식무기였으며 그것이 극단적으로 발달한 것이 천자총통을 위시한 화포였다. 본래 화포는 무거워서 이동이 곤란했고 당시의 도로여건을 생각해보면 가지고 다니면서 싸우기보다는 성 같은 요새에 비치하여 운용하기에 좋은 무기였다. 그렇다면 판옥선만큼 화포가 잘 어울리는 곳은 없었다. 판옥선 자체가 작은 성을 방불케 할 정도였고 게다가 스스로 움직일 능력이 있지 않은가? 강력한 화포를 수십 문씩 보유하고 원하는 장소로 이동할 수 있는 판옥선의 그야말로 바다를 떠다니는 요새였다.

 

거기에 성이라는 방어적 개념을 대입해보자. 공격해 오는 적을 피해 일단 성에 들어가면 한숨 돌리고 차분히 대책을 마련할 수 있었다. 거기 있는 모든 인원들은 군인이든 민간인이던 간에 살고 싶으면 전투에 참가해야 했지만 그것이 상당히 긍정적인 효과를 창출할 수 있었다. 야전에서는 훈련 받은 정규군이 아니면 전투력이 될 수 없지만 성에 들어가면 전혀 훈련받지 못한 농부라도 시키는 대로 돌을 던지고 끓는 물을 퍼부으면 훌륭한 전투원이 될 수 있었다. 거기에 아녀자들은 밥을 지어 취사병의 역할을 할 수 있었고 하다 못 해 아이들이라도 화살과 돌멩이를 날라서 보급의 일익을 담당할 수 있지 않은가? 쉽게 말해서 총력전을 펼 수 있었고 우리는 그런 전투에 익숙했다. 판옥선은 바로 바다의 성이었다. 일단 판옥선에 오른 이상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육지의 성에서는 혹시라도 탈출하거나 투항할 수 있었겠지만 망망한 바다에서 탈출해봐야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어쩔 수 없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수밖에 없었지만, 거기에 엄청난 화력이 배치되자 최강의 공격력과 방어력에 기동력까지 겸비한 무서운 요새가 탄생한 것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원균은 이순신보다 몇 배나 많은 판옥선을 가지고 있었음이 확실한데도, 왜 그토록 어이없는 참패를 당했다는 것인가? 사극 [불멸의 이순신]에서 그토록 띄워주었던 원균의 능력이라면 최소한 이순신과 대등한 전과를 거두었어야 마땅한데 전혀 그 반대라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순신과 완전히 대등한 조건을 구비해보자. 1597년 2월, 원균은 이순신을 모함하여 감옥에 보내고 자신이 그 자리를 꿰찼다. 무기와 장병들의 숙련도 등등의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대등한 상태였다. 하지만 원균은 그 막강한 함대를 일본 수군에게 가져다 바쳤을 따름이었다. 그러고도 자신은 살겠다고 도망치다가 육지에서 최후를 맞는다. 이억기와 최호 같은 부하 장수들은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지만 모든 것을 책임져야할 원균이 대체 무슨 짓이라는 말인가?

 

전쟁 초기의 원균은 경상우수사로서 가장 강력한 전력을 보유했고 가장 적에게 근접했다. 쉽게 말해서 공을 세울 가장 좋은 기회를 맞았으니 장수된 자라면 당연히 신명을 다 바쳐 싸워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싸우지도 않고 도주했고 그 결과 남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좋다, 그때는 처음이었으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이후에 이순신이 구축한 최강의 전력을 꿰찼을 때는 그 강력한 무적함대를 아예 통째로 말아먹고야 말았으니,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다. 원균이 주장(主將)이었을 때 세운 공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바쳐지는 것이었으니 그는 조선의 장수가 아니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충신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 원균은 언제나 이순신의 그림자로 기능하지 않았다. 최근 들어 오히려 ‘가장 큰 공을 세웠으나 이순신에 의해 공을 강탈당한 최대의 피해자’로 부각되고 있다. 그런 해괴하기 짝이 없는 주장은 원균이 이순신과 함께 1등 공신의 반열에 들었다는 것에서 발원한다. 나중에 이순신, 권율, 원균이 1등 공신에 책봉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니까 필시 이순신에 버금가는 공을 세웠을 것으로 짐작하는데 그것은 말 그대로 짐작에 그칠 뿐이다. 원균이 세웠다는 공을 입증할 증거가 아예 없으며 나아가 그의 행적 전체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원균은 1등은커녕, 2등도 과분하였지만 당시의 특수한 상황에 따른 반대급부를 분에 넘치게 수혜한 것이었다. 현재의 가장 권위 있는 상인 노벨상에서도 부정이 발견되거나 심사의 하자로 인하여 수상이 취소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하물며 임금의 의사가 최대로 반영되는 공신 책봉에서 하나쯤의 부정이 개입되는 것은 그리 이상할 것도 없으며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원균인 것이다.

 

내 의견이 지나치게 주관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훨씬 객관적인 샘플을 추출하겠다. 이순신에 대한 가장 공식적인 기록은 바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로서 조선의 22대 군왕인 정조 시대에 편찬된 것이다. 정조의 어명에 의해 편찬된 이충무공전서는 14권에 이르는 방대한 것으로서 이순신에 대한 모든 기록이 집대성 된 것이다. 조선의 역사는 물론 세계의 역사를 통틀어도 어떤 개인에 대한 기록을 그렇게 방대하게 편찬한 사례는 유례가 없다. 그러면 왜 정조는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였을까? 정조의 부친은 당쟁의 제물로 처참하게 희생된 사도세자였다. 정조는 부친의 원한을 결코 잊을 수 없었지만 군왕으로서의 책임은 더욱 무거운 것이었다. 당쟁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뜻을 펼치겠다는 정조의 의지는 필연적으로 강하고 위대한 영웅을 찾게 되었고 그에 가장 합당한 인물이 바로 이순신이었다. 정조는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는 것으로 자신의 의지를 분명히 표출했다. 만일 원균이 이순신에 필적할 수 있는 영웅이었다면 왜 원균전서가 거론되지 못했는가? 원균은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부터 그 존재가 사라진다. 당쟁의 도구로서 이용가치가 다하자 누구도 그를 찾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당대의 석학들은 끊임없이 이순신을 찬사했다. 그러나 누구도 원균을 칭송하고 찬양하지 않았다. 그것은 억울한 누명이 아니라 당연한 대우에 불과할 뿐이다.


원균에 대해서는 차마 더 이상 말하고 싶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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