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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Wiz(2006-07-19 18:56:16, Hit : 4545, Vote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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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 이순신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 2편


이번에는 이순신의 전술에 대해 약간 고찰해보자. 임진년 5월 7일의 첫 전투인 옥포해전은 적함대가 포구에 있을 때 급습하여 도주로를 차단하고 당황한 적을 간단하게 섬멸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후의 거의 모든 전투가 그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같은 해 7월 8일 한산도 해전에서 일본의 주력 120척을 격멸하는 엄청난 대전과를 세울 때는 약간 다른 형태였다. 이순신은 둘로 분산된 적의 주력 가운데 먼저 포착한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대를 한산도 앞의 견내량으로 유인하여 웅장한 대학익진(大鶴翼陣)으로 단 일격에 박살냈다. 그 다음 안골포에 주둔한 가토 요시아키와 구키 요시다카의 함대를 기습하여 섬멸하였으니 그 부분은 이전의 형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떤 시대의 전투든 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적을 먼저 발견하는 것이다. 이순신은 사방에 정찰대를 파견하고 민간인들의 적극적 참여를 유도했으며 함대를 끊임없이 기동시켰다. 그리하여 적의 시야에서 사라진 다음 가장 좋은 공격위치를 점유할 수 있었다. 적들이 정박한 포구를 봉쇄하여 발을 묶어버리고는 안전한 거리를 확보하고 무서운 화력을 퍼부었다. 그것은 완전히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다만 죽이고 침몰시키는 데 걸리는 시간이 문제일 뿐이었다.

 

잠깐 요약하면, 철저한 기동정찰 -> 적 발견 -> 항만의 출구를 봉쇄 -> 대장군전 같은 중화기로 강타하여 기세를 꺾음 -> 접근하면서 포탄으로 가격하여 기동력 제거 -> 근접하면 7)세전(細箭)과 조란환(鳥卵丸)으로 집중사격을 가하여 전투력 제거 -> 무력화된 적 함대를 태워버림 -> 나중에는 일단 전리품을 탈취한 다음 태워버림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접근 돌입하여 백병전으로 승부를 내는 게 전부였던 그 시대의 해전에 포격전은 전혀 예상치 못한 근대적인 개념의 전술이었다. 거기에 머리카락 한 올의 오차마저도 용납하지 않는 이순신의 웅장하고 예술적인 지휘가 배합되자 일본 수군은 도저히 당할 재간이 없었다.

 

*주석

7) 세전(細箭)은 총통에서 발사되는 짧은 화살이며 조란환(鳥卵丸) 역시 총통에서 발사되는 새알만한 크기의 조약돌이다. 화약의 폭발력으로 발사되는 세전과 조란환은 어지간한 철갑은 그대로 관통할 정도여서 근접전에서는 최강의 무기였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만일 처음의 전투에서 느닷없이 일본의 대 함대와 마주쳤다면 그리 쉽게 이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육중한 판옥선으로는 일본 수군의 주력인 중형전함 세키부네의 민속한 운동력을 따라 잡기 어려웠을 것이며 화포을 쏘아도 제대로 맞추지 못해 각개격파 당하기 쉬웠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순신은 그런 점을 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고 지나칠 정도로 철저한 수색정찰을 실시했다. 첫 단추를 잘 끼울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갑자기 바다에서 함대가 줄줄이 실종되기 시작하자 일본군 수뇌부는 크게 당황했다. 육군들은 거의 날듯이 진격하여 부산에 상륙한지 불과 20일 만에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탈취했지만 서해를 거슬러 올라와 보급을 조달해 주어야 할 수군은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설마 수군이 전멸당하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상당히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조선의 왕인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도망간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거의 동시에 한양에 입성한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는 어리둥절했다. 일본의 경우에는 일단 상대방의 수도를 함락시키면 그것으로 전쟁은 끝이었다. 그곳을 지배하던 자와 비중 있는 가신들은 패배를 인정하고 깨끗이 할복하는 것이 정해진 순서였다. 이번 전쟁에서도 조선의 수도를 함락시키면 전쟁이 끝나는 것으로 알았고 그렇기 때문에 누가 먼저 한양에 입성하는가를 놓고 피터지게 경쟁했지 않았던가? 그런 것에 익숙했던 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왕이라는 자가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간 것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된 이상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서해를 돌아 한강을 거슬러 올라올 함대를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선조의 도주로를 따라 북상하며 추격했고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 방면으로 올라갔다. 마침내 6월 15일 고니시는 평양성을 함락시켰지만 그때는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이번에도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야할 일본함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때는 이순신이라는 불세출의 용장이 일본함대를 닥치는 대로 바다에 쓸어 넣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진 다음이었다. 보급을 전혀 바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고니시는 더 이상의 진격을 포기하고 평양에 웅거했다. 그런 사정은 7월 25일 조선의 북방 국경 요새인 회령에 입성가토 기요마사도 마찬가지였다.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출격하기도 했지만 여진족 부락 몇몇을 발견했을 뿐,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결국 가토 역시 회령으로 돌아와 웅크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문제는 이순신이었고 가장 큰 피해자는 당연히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이, 하다못해 번듯한 인물도 소유하지 못했지만 밑바닥 인생에서 출발하여 오직 자신의 기량으로 일본의 지배자로 등극했던 그가 아니었던가? 오십 둘에 이른 지금까지 - 이순신보다 네 살이 많았다 - 격파하지 못한 적이 없었고 함락하지 못한 요새가 없었으며 승리하지 못한 전쟁이 없었던 그였다. 이번의 조선 원정도 필승할 것은 전혀 의심치 않았었다. 명나라를 침공하여 점령하겠다는 공언을 실천하는 첫 단추는 조선을 정복하는 것으로 꿰어야만  했다. 일단 허약해 빠진 조선을 점령한 다음 거기서 겨울을 나면서 전력을 비축할 작정이었다. 실전경험이 풍부한 일본 자체의 병력에다 조선의 병력을 차출하여 가세시키면 최소한 30만 대군이 편성될 수 있었고 식량과 무기의 보급은 조선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 다음 해 봄이 되면 주력은 서해를 건너 명나라의 해안에 상륙할 것이며 일부는 압록강을 도하하여 만리장성을 넘을 것이었다.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듯이 중국이 그렇게 호락호락 당하겠느냐는 비관론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체가 정신이 혼미해진 것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충분한 확신이 있었다.

 

히데요시가 볼 때 명나라는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다. 노쇠의 단계를 지나 망국의 조짐마저 보이는 명나라와는 충분히 겨뤄볼 만 했다. 일단 상륙에 성공하고 압록강을 도하한 병력이 변방을 공격하면 명나라는 즉시 혼란에 빠질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타타르를 위시한 국경의 야만족들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제히 봉기할 것이 분명했고 그것은 다시 내부의 불만분자들의 반란을 유발시킬 터였다. 그런 위기상황에 대처할 능력을 전혀 보유하지 못한 명나라는 멸망의 무덤으로 안치될 터였고 제국의 멸망은 본래 그런 수순을 밟아나가는 것이었다. 조선을 정복하고 가장 위대한 제국을 멸망시킨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것은 이제까지의 일본의 어느 누구도 감히 꿈에서조차 생각지 못한 엄청난 대 위업이 아닌가? 일본 최초의 공식적 해외원정에서 전무후무한 위업을 이루어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역사에 길이길이 추앙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어디서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이순신이라는 놈이 불쑥 나타나 원대한 야망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미 이순신이라는 자에게 격침당한 전함은 3백 척이 훨씬 넘었고 잃어버린 병사들과 물자는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계속 이렇게 나가다가는 수군이 서해를 거슬러 올라 대전략인 수륙병진책을 완성시켜 조선을 병합하기는커녕 상륙한 육군들이 굶어죽을 지경이었다. 결국 이순신을 제거하지 않고는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판단 아래 최고의 용장들인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구키 요시다카에게 명하여 일대결전을 걸었으나 한산도와 안골포에서 처참하게 패배했다는 것은 이미 설명한 바가 있다. 도도 다카도라를 필두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수군의 최고봉으로 명성이 쟁쟁하던 구키 요시타카, 와키자카 야스하루, 호리우치 우지요시, 가토 요시아키, 가메이 고레노리, 구루지마 후사모토, 후쿠시마 마사노리, 시마즈 요시히로 등등, 일본 최고로 정평이 난 장수들이 마치 순서를 기다렸다는 듯 속속 참패했으니 참으로 제정신으로는 믿기지 않을 일이었다. 당연히 전함과 병력의 손실은 엄청난 것이었고 보급을 받지 못하는 육군들의 운명도 결정적이었다. 이순신을 그냥 두고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순신과 싸워봐야 대체 뭐를 어쩌겠는가? 이제 일본군들은 이순신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거품을 물고 졸도했다. 심지어 부산에서는 이순신이 온다는 말에 바다에 뛰어들어 쓰시마까지 헤엄쳐 도망간 병사까지 나타나는 실정이었다. 일본 수군 병사들은 이순신을 만나는 날에는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바다에 뛰어드는 것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고 수군거릴 정도였다. 결국 히데요시는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과연 어떤 인물이며 일본군의 전술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보도록 하자. 모든 것이 그렇지만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인물을 논할 때는 원한과 증오를 걷어낸 다음 시작해야만 한다. 필자의 분석에 따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로 전혀 손색이 없다. 내가 공부한 결과 히데요시의 머리는 인간의 머리가 아니라는 결론을 얻을 정도였으니까,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들을 꼽으라면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 사람이 항상 빠지지 않는다. 세 사람은 같은 시대의 인물이었고 서로의 인생 가운데 상당부분이 겹쳐져 있다. 100년에 걸친 전국시대(戰國時代)를 종식시켜 평화의 기초를 다진 풍운아 오다 노부나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인이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도 사돈지간으로 맺어진  확고한 동맹관계였다. 천하통일을 거의 눈앞에 둔 노부나가가 믿었던 부하 아케지 미쓰히데의 배신으로 죽자 유력한 가신으로 성장했던 히데요시가 경쟁자들을 격파하고 천하를 통일시킨 것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결코 2인자로 만족할 인물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히데요시와 직접 겨루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일단 처남매제의 혼인동맹을 맺고 충성을 맹세하기에 이른다. 나중에 천하를 제패하고 에도막부(江戶幕府)를 개창하게 되는 이에야스도 그때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일본 제일의 경영자로 추앙받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마저도 무릎을 꿇리는 히데요시의 기량은 실로 무서운 것이었다.


나는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의 세 사람 가운데 가장 유능한 사람은 단연코 히데요시라고 판단한다. 노부나가와 이에야스의 능력도 상대를 찾기 어려운 최상급이지만 그들이 당당한 무사 가문의 후계자로서 유능한 가신들의 보필을 받았던 반면, 히데요시는 천민의 자식으로서 모든 과정을 스스로의 능력으로 쟁취하지 않았던가? 그것만 보아도 히데요시의 능력이 어떤 수준인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일본인들의 평가는 상당히 다른 것 같다.

 

예전에 일본의 유수한 신문사 - 요미우리가 아닌가 싶다 - 에서 대재벌의 총수들에게 자신은 누구와 흡사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설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대 상당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꼽았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거의 꼽히지 않았다고 한다. 설문에 응한 사람들이 이미 검증된 부류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에야스의 능력이 제일이라는 결과로 제시될 수 있겠지만, 거기에는 상당한 허점이 보인다. 그들이 이에야스에게 후한 점수를 준 것은 자신들과 같은 경영자의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야스가 막부를 창건하고 물려주어 평화를 정착시킨 좋은 결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려면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공이 이에야스만 못하겠는가? 설문조사에 응한 그들도 히데요시의 능력은 당연히 인정하지만 그의 비천한 신분과 출신성분을 생각하면 선뜻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히데요시가 실패했다는 결과론도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만일 그가 중국은 몰라도 조선 정도는 정복했었더라면, 그래서 일본인들이 몽매에도 그리는 허상의 임나가라(任那加羅)를 실체로 구현해 내었다면 평가는 달라졌겠지만 실패한 자는 언제나 푸대접을 당할 뿐이다. 그는 일본으로서는 과히 기억하고 싶지 않은 영웅이었다. 실제 나는 임진왜란 기간 중의 일본역사가 거의 블랙홀에 가깝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부분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고의성이 개입된 것으로 밖에 판단되지 않았다. 하기야 남들 역사도 입맛에 맞게 뜯어고치는 자들이 무슨 짓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그런 면에서 보자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피해자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당시 일본군의 주요전술을 살펴보기로 하자. 조선군이 목격한 일본군의 보병전술은 흔히 조총으로 대표되는 개인화기의 일제사격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그리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조선에는 그런 발사무기가 전혀 없었던 것인가? 그렇지 않다. 공용화기인 화포를 보자면 우리가 압도적으로 우세했고 개인화기에서도 이미 승자총통(勝字銃筒)이 일반화 되어 있었다. 객관적 비교가 곤란한 화포는 그만두고 승자총통의 살상력은 일본군의 조총에 비해서 조금의 손색이 없었다. 그런데 왜 그토록 밀렸다는 말인가? 그 원인은 발사 장치에 있었다. 총통 종류의 발사방식이 도화선이 타들어가서 화약을 점화시키는데 비해, 조총은 방아쇠를 당기면 그 끝에 물린 도화선이 화약을 점화시키는 방식이었다. 총통은 아무리 다급해도 도화선이 타들어가 화약에 닿아야 발사되었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었고 표적이 갑자기 숨어버린다면 그 또한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조총은 사수가 원하는 타이밍에 발사가 가능했다. 개인적으로 보아서는 저격이 가능했고 단체적으로 운용되면 집중사격이 가능했으니 조선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물론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국가적인 시스템 자체가 아예 상대가 되지 않는 수준이라는 것이 가장 큰 요소겠지만 초전에 등장한 조총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 것이 사실이었다.  

 

일본에 근대적 발사무기가 처음 전래된 것은 1543년, 규슈 남쪽의 섬 다네가시마(種子島)에 닿은 포르투칼 상인들에 의해서였다. 다네가시마의 영주는 처음 보는 무기의 효용가치를 즉시 알아보았다. 그는 딸을 바치는 동시에 막대한 돈을 주고 구입한 다음 그것을 복제해내었다. 일본도를 만드는 단조기술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어서 복제는 비교적 수월한 편이었다. 당시 일본은 전쟁으로 날을 지새우던 상황이라 뎃뽀(鐵砲 - 철포)라고 명명된 그 무기는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었다. 뎃뽀의 등장은 전쟁의 개념 자체를 뒤엎어버렸다. 그때까지 전쟁의 주역은 철갑기마무사였다. 온몸을 철갑으로 감싼 기마무사의 돌격에 보병 수십 수백이 그대로 허물어지기가 일쑤였으니 그런 무사들을 많이 확보하는 것이 큰 관건이었다. 무사를 양성하는데 적지 않은 시일과 비용이 투입되었지만 그들이 없는 전쟁은 결코 있을 없었다. 그러나 뎃뽀의 등장으로 보병이 철갑기마무사를 죽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예전 같으면 꿈에서도 불가능할 일이었지만 이제 뎃뽀 한 방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뎃뽀는 배우기도 쉬워서 평범한 보병들도 쉽게 습득할 수 있었다. 뎃뽀로 무장된 보병들이 전장에 나타나자 철갑기마무사들은 허무하게 쓰러졌다. 거기에 큰 충격을 받은 영주들은 뎃뽀를 구입하려 혈안이었다. 지금처럼 대량생산이 가능한 시대가 아니어서 당연히 뎃뽀는 비쌀 수밖에 없었고 그것을 충분히 구입할 수 없는 영주는 도태되어야만 했다. 무턱대고 설치는 사람을 무뎃뽀(無鐵砲)라고 하는데, 그것은 뎃뽀도 없이 오로지 용맹만을 믿고 덤비는 무사들을 이르는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1592년 4월 28일, 조선 최강의 용장인 신립이 지휘하던 조선 기병군단의 참패는 전형적인 무뎃뽀들의 최후였다. 이미 장전을 마치고 기다리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뎃뽀 - 조선에서는 조총이라 불렸다 - 부대 정면으로 돌격한 조선의 용맹한 기마무사들은 일제사격의 굉음 앞에 피를 뿜으며 무너졌다. 크게 놀란 신립이 2진, 3진이 계속 돌격시켰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일 뿐이었다. 조선의 기병 전력을 일시에 상실한 신립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남한강의 푸른 물결에 몸을 던졌다. 이후는 완전한 무인지경이었고 조선의 멸망이 바로 앞에서 위태롭게 간당대었다.

 

그러나 바다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신출귀몰하게 나타나 포위한 다음 까마득한 거리에서 엄청난 중화기로 가격하는 이순신 함대는 어떻게 대적할 방법이 없었다. 상황을 파악할 사이도 없이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되는 참패에 속수무책이었다. 분통이 터진 일본군은 마침내 정면으로 승부를 걸었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순신이라는 이름은 최악의 악몽이었고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승진하여 한산도로 진영을 옮긴 이후부터 일본군은 감히 얼씬거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일본 수군은 그때까지의 해전에 가장 잘 적응하였지만 시대를 앞서간 이순신의 독창적 전술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것이 결정적 패인이었다. 아니, 조선에 이순신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 그 전쟁의 진정한 패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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